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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성역
란항
란항은 중국 사천성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도시로 이주한 뒤의 정서적 변화와 기억의 흔적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입니다. 현재 충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조용한 화면 속에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감정을 섬세하게 겹쳐냅니다.

그의 작업은 전통 재료인 비단과 먹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의 잔상에 가깝습니다. 안개 낀 연못, 흐릿한 나무들, 눈 덮인 성소 같은 이미지들은 선명하기보다 흐르고 번지는 감정의 풍경으로 다가옵니다.

란항의 화면에서 인물과 풍경은 늘 명확하지 않고, 말을 맺지 않은 문장처럼 미완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이 흐릿함은 작가가 경험한 도시와 자연, 중심과 주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특히 그는 비단 위에 먹을 번지게 하여, 감정이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작업에는 중심도, 결론도 없습니다. 대신 기억과 감정이 퍼져나가는 리듬만이 조용히 화면을 채웁니다.

란항의 작업은 《문명의 이웃들》이라는 이번 비엔날레 주제 속에서, ‘이웃됨’을 감정의 흐름과 연결로 풀어냅니다. 그의 화면 속 ‘바다’는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공감과 기억이 오가는 보이지 않는 통로처럼 느껴집니다.

이 조용하고 서정적인 그림 앞에서 관람자는 자신 안의 감정과 잊고 있던 기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란항은 전통 수묵의 재료를 통해 오늘의 감정과 동아시아적 감수성을 담담히 건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