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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랑
이곳에 전시된 작품은 조세랑 작가가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위해 제작한 대형 수묵채색 콜라주 작업, 〈려〉입니다.

작품 제목 ‘려’는 주역 64괘 중 화산려괘, 즉 ‘나그네’를 뜻하는 괘에서 따온 것입니다. 산 위에 떠오른 불처럼,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존재, 낯선 세계로 떠나는 유랑의 형상을 상징하지요.

조세랑 작가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해온 이주적 삶을 바탕으로, 이번 작업에서 물과 불, 문명과 이동, 전통과 실험의 키워드를 풀어냅니다.

작품은 다양한 화선지 조각들을 이어붙여 하나의 장대한 화면을 구성하는데요, 이는 단순한 콜라주를 넘어, 시간의 파편과 기억의 단서들을 엮어낸 시각적 여정입니다.

작가가 오랫동안 실험해온 ‘떼어내고, 다시 붙이는’ 방식은 마치 나그네가 길 위에서 마주친 이야기들을 한데 엮어가는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화면 속의 ‘물’은 수묵 특유의 번짐과 스밈을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세계의 무상성을 상징합니다.

반면 ‘불’은 문명의 충돌과 변화, 사라짐과 생성을 드러내며, 서로 상반된 이 두 요소가 한 화면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합니다.

또한, 이 작업의 핵심은 시간성입니다. 각기 다른 시기에 그려진 종잇조각들이 만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몸처럼 맞물리는 시공간이 펼쳐집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분별의 마음으로 보는 세계는 허상으로 가득하다.”

그 말처럼, 이 작품은 고정된 관념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감각을 새롭게 열어보려는 시도입니다.

〈려〉는 하나의 작품이자, 작가 자신의 자서전적 여정입니다. 국경과 전통, 언어와 시대 사이의 경계를 유랑해온 그의 삶이 한 폭의 그림 안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