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인 방
파라스토우 포로우하르
당신이 지금 마주한 이 방은, 검은 잉크로 빼곡히 채워진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벽과 바닥을 타고 흐르는 이 낯선 기호들은 페르시아 문자입니다. 이 공간은 작가 파라스투 포로우하르가 10일에 걸쳐 손수 쓴 글씨로 완성한 설치작품 《Written Room》입니다.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은 모두 지워지고 사라집니다.
사라진다는 것. 바로 그 일시성 자체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 포로우하르는 이주와 부재, 정체성과 기억의 문제를 이 일시적 공간 속에 담아냅니다. 1962년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나, 혁명 이후 자유를 잃고 1991년 독일로 이주한 그녀는, 이방인으로서의 감각과 상실을 작업의 중요한 주제로 삼아왔습니다. 특히 부모가 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비극적인 개인사 또한 작품의 정서적 바탕이 됩니다.
"독일에선 ‘이란인’으로, 이란에선 ‘독일인’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제 예술은 그 사이, 누구의 것이 아닌 공간을 가꾸는 일입니다."
– 작가의 말입니다.
〈Written Room〉은 단지 이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구가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 즉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이자 해체이기도 합니다. 문자들은 읽히지 않지만, 그 읽히지 않음 자체가 서구의 편견과 시선의 구조를 드러냅니다. 보는 이들은 이 문자를 '장식'처럼 소비하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문화 간 소통의 한계와 오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모국어의 몸체예요.
더 이상 말이 되지 않지만, 기억이 되고, 슬픔이 되고,
어떤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이 되죠.“
이 작품은 1999년부터 세계 여러 도시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에서 그 한시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수묵이 붓과 먹으로 정신성과 감정의 깊이를 표현해온 것처럼, 포로우하르의 문자도 언어를 넘은 보편적 미감과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냅니다. 읽히지 않는 문자, 그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깊이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