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상
고암 이응노 – 문자에서 인간으로, 동양에서 세계로
여러분이 보고 계신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고암 이응노(1904-1989)의 대표작들입니다. 그는 남도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예술가가 된 인물로, 전통 서예를 현대 추상미술로 발전시킨 선구자입니다.
고암의 예술은 글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문자를 단순한 기호로 보지 않았어요. 그에게 글씨는 정신과 몸의 궤적이었습니다. "나는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가 나를 쓰게 한다"는 그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이 문자추상 작품들을 살펴보세요. 황토색 바탕에 검은 형태들이 반복된 작품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글자 같나요? 실제로는 읽을 수 없지만, 마치 고대 석비나 원시 문양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고암은 한글과 한자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새로운 시각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강렬한 파란색 작품도 보이실 겁니다. 이는 단순한 색깔이 아닙니다. 현대 문명 속에서 문자와 이미지가 겪는 변화를 상징합니다. 반복되는 형상들은 집단의 목소리, 공동체의 흐름을 나타냅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형태가 거의 사라질 정도로 희미합니다. 먹의 번짐과 여백만 남아 있죠. 이는 기억과 망각, 존재와 사라짐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문자가 구체적 의미를 잃으면서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담게 되는 순간입니다.
고암의 또 다른 대표작인 「군상」 시리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뜻 글씨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얽혀 있어요. 걷고, 멈추고, 모이고 흩어지는 인간 군상의 모습입니다.
이 작업은 고암이 1967년 파리에서 시위에 참여한 후 더욱 집중하게 된 주제입니다. 분단과 이산, 억압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개인의 감정과 시대의 아픔이 만나는 지점을 형상화한 거죠.
고암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보는 글'이라는 개념입니다. 읽을 수는 없지만 강렬한 시각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문자 언어를 만든 겁니다. 글자가 빠르게 사라지는 디지털 시대에, 그의 문자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고암은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형식을 창조적으로 결합했습니다. 전통 서예의 붓놀림과 현대 추상의 자유로움이 하나가 된 거죠. 그래서 그의 작품은 동서양 어디서든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생각해보세요. 획은 단순하지만 살아 움직이고, 여백은 비어 있지만 그 안에서 감정과 기억이 피어오릅니다. 고암이 붓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침묵 속에서 말하는 방식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남도에서 시작해 세계로 나아간 고암 이응노. 그의 예술은 전통과 현대, 문자와 인간, 정신과 예술이 어떻게 만나고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