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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탁본
소전 손재형 – 서예를 예술로 만든 사람
소전 손재형(1903-1981)-그는 글씨를 예술로 만든 사람입니다.
단지 붓을 잘 쓰는 기술자가 아니라,
한국 서예를 시대의 예술로 끌어올린 기획자이자 실천가,
그리고 그 정신을 남겨준 교육자였습니다.

전시실에는 그의 다양한 서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문과 한글, 예서와 초서, 족자와 병풍 등 형식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붓끝엔 한결같은 절제와 기개, 그리고 조형 감각이 살아 있습니다.
소전의 글씨는 단정하거나 장식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획 한 획마다 묵직한 생명력이 흐릅니다.
그는 전통 서법을 깊이 익히되, 그 안에 시대의 호흡과 한국적인 미감을 덧입혀 근대 서예의 독자적 흐름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손재형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가 남긴 작품만이 아니라, 그가 만든 개념과 실천들까지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예’-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이 단어는,
사실 손재형이 글씨를 하나의 예술로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정립하려 했던 실천 속에서 자리 잡은 개념입니다.
조선시대까지 글씨는 흔히 ‘서화’나 ‘필도’로 불리며, 문인의 교양이나 수양의 영역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글씨는 예술이다.”

그는 붓과 먹의 미학을 현대 미술의 장르로 끌어올렸고,
전시를 열고, 책을 펴내고, 후학을 길러내며 그 정신을 제도 안으로, 일상 안으로 스며들게 했습니다.
그가 남긴 인장, 필사본, 실기 교재, 그리고 수많은 서체 연구와 교육 자료들은 단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글씨를 통해 삶을 새기고, 전통을 오늘로 옮겨온 도구였습니다.

진도의 땅에 자리한 소전미술관은, 그가 사랑하고 애정을 쏟았던 삶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의 호 ‘소전(素田)’은 ‘흰 밭’이라는 뜻으로,
비워진 자리 위에 새로이 쓰고 가꾼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불꽃은 글씨로 남았고, 제자들의 붓끝으로 이어졌으며,
지금 이 전시실 벽면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붓은 멈췄지만, 정신은 이어집니다.
손재형의 글씨 앞에서 우리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오늘 다시 호흡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