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취한중득 심화정리개
철농 이기우 – 고요한 마음으로 길을 연다.
지금 여러분이 마주하고 계신 이 대형 해서 글씨는 서예가 철농 이기우(1921–1993)의 작품입니다. 철농은 한국 현대 서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전통 서예를 현대적 시각예술로 확장시킨 인물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전통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줄 한 줄, 단단하게 새긴 글자는 조용하지만 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습니다.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而無鬪志, 中得第謀, 謀講實, 寒開.”(이무투지, 중득제모, 모강실, 한 개) “다툼을 구하지 않되, 내면의 뜻을 깊이 세우고, 진실을 강론하며, 추운 시절에도 길을 연다.”
철농은 이 문장을 통해 한 인간이 견지해야 할 삶의 태도를 조용히 전합니다. 외적 경쟁보다는 내적 성찰을, 화려한 수사보다는 진실한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 ‘寒開(한개)’—추위 속에서도 열린다는 말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를 상징합니다.
철농의 글씨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해서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독창적인 변화를 보여줍니다. 각 글자의 골격이 단단하면서도 경직되지 않으며, 획의 굵기와 속도 변화를 통해 생동감을 표현합니다.
그는 주로 전서와 예서라는 고대 문자 양식을 연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라, 문자의 원형에서 현대적 조형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역설적 접근법이었습니다.
작품의 구성을 보면, 글자들이 화면에 배치된 방식이 건축적 균형감을 보여줍니다. 여백의 활용도 적극적입니다. 비어있는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글자와 상호작용하며 전체적인 조화를 만들어냅니다.
철농의 서예는 문자의 기능을 넘어섭니다. 정보 전달의 도구였던 글자가 순수한 조형 예술로 변화합니다. 읽히는 글이 아닌 감상되는 이미지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작업 방법은 철저히 수작업에 의존했습니다. 각 획마다 작가의 호흡과 신체적 움직임이 직접 기록됩니다. 이는 기계 복제가 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표현 영역입니다.
작품의 완성도는 철농의 오랜 수련과 깊은 사유의 결과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글자 하나하나에 수십 년의 경험과 철학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철농의 작업은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손글씨의 가치, 빠른 소통 시대에 느린 사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릅니다. 철농이 문자에 담아낸 "추위 속에서도 열리는"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