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덕 내탓
학정 이돈흥 – 전통에서 피어난 현대의 붓 끝
여러분이 보고 계신 작품들은 학정 이돈흥(1947-2021)의 서예입니다. 그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21세기 한국 서예계의 10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학정은 20세 무렵 아버지의 권유로 송곡 안규동 선생 문하에 들어가 서예를 시작했습니다. 안규동은 당시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학정은 그로부터 전통 서법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유지경성」은 '뜻이 있으면 이룬다'는 의미로,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획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며, 각 글자가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 조화를 이룹니다.
「춘설전다」는 '봄눈이 차를 전한다'는 서정적 내용입니다. 글씨체에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운 전환이 느껴집니다. 이는 학정이 문장의 의미를 글씨의 형태로 구현한 사례입니다.
「안빈낙도」와 「수처작주」는 그의 삶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가난해도 편안하고 도를 즐긴다', '어디서든 주인이 된다'는 뜻으로, 불교적 수행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글씨에서 욕심 없는 담담함과 내적 충실함이 드러납니다.
「서해어룡동」은 특히 주목할 작품입니다. '서해에서 물고기와 용이 움직인다'는 역동적 내용에 맞춰, 붓의 움직임이 물 속을 헤엄치는 듯한 유연함을 보여줍니다. 강한 필압과 유려한 흐름이 대조를 이룹니다.
학정의 서체는 '학정체'라고 불립니다. 그는 다양한 고전 서체를 깊이 연구한 후, 자신만의 현대적 감각을 더해 독창적인 서풍을 완성했습니다. 전통을 계승하되 그대로 모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글씨 특징을 보면, 첫째는 구조의 균형입니다. 각 글자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경직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필획의 변화입니다. 굵기와 속도, 압력을 조절하여 단조로움을 피했습니다.
셋째는 여백의 활용입니다. 글자 사이, 행 사이의 공간이 적극적 역할을 합니다. 이 여백이 있어야 글자들이 숨을 쉴 수 있고, 전체적인 리듬이 살아납니다.
학정은 7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서예는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닌 삶의 수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씨에는 과시적 요소가 없고, 깊은 사유와 정신적 성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의 작업 방식은 철저한 기본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전통 서체를 수십 년간 연마한 후, 그 바탕 위에서 자신만의 표현을 찾아갔습니다. 이는 전통과 창신의 올바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현재 화엄사, 해인사, 불국사 등 주요 사찰에 그의 현판과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그의 서예가 개인적 취미를 넘어 공공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학정 이돈흥의 서예는 문자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조형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의 붓끝에서 전통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적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