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병제도
다산 정약용
지금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이 두 작품은 조선 후기의 대표 실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시절에 남긴 기록입니다.
하나는 <매화병제도>, 낡은 치마 천 위에 그린 매화 그림이고,
또 하나는 <다산 간찰>, 그가 제자와 지인에게 보낸 손글씨 편지입니다.
먼저 <매화병제도>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바탕은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이 보낸 치마 천입니다.
다산은 그 낡고 바랜 천을 단순한 생활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위에 매화를 그리고 시를 써서, 강진까지 찾아온 딸에게 선물로 건넸습니다.
매화는 오래도록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고결함의 상징이었고,
다산은 그 꽃을 통해 인내와 품격, 그리고 절제된 사랑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절제 속에 오히려 깊은 감정과 사유가 배어 있습니다.
<매화병제도>는 그림이자 편지이고, 동시에 하나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다산 간찰』은, 말 그대로 정약용이 직접 쓴 편지글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서신이 아닙니다.
이 글 한 줄 한 줄 속에는 유배자의 고요한 사유,
그리고 제자나 가족, 지인과 나누고자 했던 깊은 인간적인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다산의 글씨는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습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한 필체.
단정하고 절제된 그 붓끝에서, 실학자로서의 성정과 내면의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한 자 한 자 눌러 쓴 글씨에는 인생의 체온이 서려 있습니다.
정약용에게 수묵은 단순한 그림 기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립된 유배지에서 세상을 감각하고,
자신을 지켜내며,
문명과 윤리, 그리고 가족을 이어주는 새로운 언어였습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문명의 이웃들”입니다.
<매화병제도>와 『다산 간찰』은,
문명의 중심에서 밀려난 한 사람이
자연과 함께 걸으며 다시 써 내려간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자 기록입니다.
지금 누렇게 빛바랜 치마 천 위에 피어난 매화가,
그리고 정갈한 붓글씨 속에 담긴 마음이
조용히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합니다.
“당신에게 문명이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