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이헌정 – 흙과 먹, 머무는 형상
김환기의 푸른 점들이 멈춘 그 아래, 그가 사랑했던 조선 백자—달 항아리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이어받은 이헌정 작가의 도자가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이헌정의 작업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앉는다’는 행위, 그 조용한 몸의 상태를 떠올리게 됩니다. 바닥에는 총 7점의 도자 조형이 원을 이루듯 배치되어 있고, 그 옆 벽면에는 수묵 회화 한 점이 걸려 있어 흙과 먹, 두 매체가 조용히 호흡을 주고받습니다.
이 도자들은 어떤 것은 좌석처럼, 또 어떤 것은 비어 있는 그릇이나 잘린 나무 단면을 닮았지만, 작가는 이들을 기능적 오브제가 아닌 ‘존재가 머무는 자리’로 이해하길 원합니다.
도자의 표면에는 손의 압력, 유약의 흐름, 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검은빛, 회갈색, 옅은 황토빛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조형은 마치 지구의 한 조각처럼, 조용히 물성과 시간을 드러냅니다.
그 위에 찍히듯 남은 파란색, 붉은색, 노란 점들은 문양이 아니라 숨결입니다. 형태에 생명력을 더하고, 침묵 속에 진동을 남깁니다.
그리고 옆 벽면에 걸린 수묵 회화는, 도자의 감각을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먹의 번짐과 여백, 붓의 속도는 흙과는 다른 결이지만, 같은 호흡과 리듬으로 작가의 사유를 이어갑니다.
이헌정의 작업은 말 없이 깊은 것을 가리킵니다. 기능을 초월한 조형, 행위를 담은 표면, 침묵으로 만든 장면.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묻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앉아 있으며,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