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dio guide LIST
Language
페이징
김민정 – 종이와 불로 쌓은 시간의 층위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신비로운 작품들은 김민정 작가의 대표 연작 〈페이징〉 시리즈입니다. 김민정은 광주에서 태어나 1991년 밀라노로 떠나 20여 년간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쳐온 작가입니다.

이 작품들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닙니다. 평평한 그림이 아니라 뭔가 켜켜이 쌓여 있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김민정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한지'입니다. 그녀에게 한지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삶을 감싸는 피부 같은 것이었어요. 어린 시절 인쇄소의 종이 냄새, 붓을 들고 글씨를 쓰던 기억이 모든 작업의 출발점입니다.

그녀의 작업 과정은 정말 독특합니다. 먼저 먹으로 화면을 빠르고 강렬하게 그어냅니다. 그 다음 얇은 한지를 층층이 덧붙이고, 향불로 종이를 태워 자국을 남겨요. 불이 화면에 선을 새기는 거죠. 그 선은 질서이자 우연이고, 기억이자 상처입니다.

이런 과정은 단순한 회화 기법이 아닙니다. 시간을 축적하고 기억을 소환하는 수행적 실천에 가까워요. 작가는 쌀풀로 종이를 하나하나 덧붙이며 그 흔적을 정리하고 감쌉니다. 그 반복의 시간이 고요한 치유이자 그녀만의 수행인 셈이죠.

〈페이징〉이라는 제목처럼, 이미지와 자국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겹쳐지면서 작품이 완성됩니다. 태운 종이의 자국, 잘라 붙인 한지 조각들, 먹의 흔적이 서로 겹치고 어긋나면서 한 장의 평면이 아닌 시간과 감각이 켜켜이 쌓인 '층위'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화면은 정지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움직임과 흔들림, 충동과 절제가 공존합니다. 김민정은 자신의 작업을 "영적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현해요. 내면을 향한 여정이자 질서와 혼돈 사이를 유영하는 의식의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각기 다른 크기와 밀도, 불의 흔적과 붓의 속도감을 보여줍니다. 작품마다 반복되면서도 변화하는 화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리듬, 호흡, 그리고 내면의 미세한 진동들을 시각화한 것 같습니다.

김민정의 작업은 동양의 전통 재료와 서양의 추상적 표현을 결합한 독창적인 세계입니다. 먹과 한지, 불이라는 근원적인 재료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어낸 거죠.

그녀는 늘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왔고, 무엇으로부터 만들어졌는가?" 답은 바로 이 한지 속에, 불의 흔적 속에, 먹의 번짐 속에 있었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종이라는 얇고 가벼운 재료가 얼마나 깊은 감정과 무게를 담을 수 있는지 입니다. 여기에는 조용히 손끝으로 만지고 싶은 풍경이 있고,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감각의 언어가 깃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