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라피 산의 군주
마리안토 – 겹겹의 선, 기억의 무게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대형 작품들은 인도네시아 작가 마리안토가 2021년에 제작한 연작입니다. 그는 급변하는 인도네시아 사회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 억압과 검열을 경험했고, 아시아 금융 위기를 거치며 경제적 불안정과 혼란을 체험했어요. 이러한 시대적 흔적이 그의 모든 작품의 바탕에 깊이 깔려 있습니다.
이 연작은 자바섬 중앙에 위치한 활화산 '므라피'를 중심으로 한 신화와 기억, 그리고 현대 사회의 풍경을 담아냈어요. 총 네 점의 대형 목탄 캔버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2미터가 넘는 크기를 지닙니다.
마리안토는 수묵화와 유사한 전통적 기법을 활용하지만 단지 동양의 미감에 머물지 않아요. 그는 '스그라피토'라는 기법을 자신의 회화로 가져옵니다. 표면을 긁고 새기는 이 방식은 그 자체로 '기억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마치 상처 난 지층처럼 시간이 만든 흔적을 시각화해요.
작품을 자세히 보세요. 섬세하고도 단호한 선, 거친 듯 섬세한 질감이 보이시죠. 목탄의 '그을림'은 파괴와 재생, 상처와 흔적의 감각을 동시에 품으며, 이는 동아시아 수묵의 먹이 지닌 정신성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작가는 전통 드로잉과 판화의 형식을 바탕으로 수묵의 정신성과 흑백의 미감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해 왔어요. 그의 조형 언어는 남반구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조건과 식민의 역사, 그리고 자원 채굴과 환경 파괴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시각화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수집자'와 '채굴자'는 각각 기억을 보존하는 자와 자원을 착취하는 자를 상징해요. 이는 신화와 산업, 자연과 인간이 교차하는 동남아시아의 복합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흑백의 대비는 단순한 색의 차이가 아니에요. 그것은 억압과 저항, 침묵과 외침, 잊힘과 기억이 교차하는 경계선입니다. 때론 인간의 형상이 흐릿하게, 때론 동식물의 이미지가 상징처럼 등장하는 그의 작업은 환경 파괴와 사회 불평등, 정치적 왜곡에 대한 예술적 성찰이에요.
'수집자와 채굴자'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기억의 지층'을 구현하는 작업입니다. 자연재해, 식민과 산업, 공동체의 기억이 한 화면 안에서 중첩되며, 이웃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이번 비엔날레 주제인 '문명의 이웃들'에 완벽하게 응답합니다. 그는 전통 수묵의 형식 위에 오늘날의 불균형한 현실을 각인하며, 과거와 현재, 동양과 동남아, 미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어요.
환태평양 화산대라는 지질학적 조건과 식민 제국주의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동남아시아적 연대가 이 작품을 통해 황해를 사이에 둔 문명 간의 감응적 공명으로 확장됩니다. 마리안토의 작품 속 선 하나하나는 홀로 또 같이 고요하게 저항함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