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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240612
이강소 - 여백 위를 걷는 붓의 춤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세 점의 대형 회화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이강소의 2024년 신작 연작 〈The Wind Blows〉 시리즈입니다. 제목 그대로 '바람이 분다'는 이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을 붓질과 여백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예요.

이강소의 작품 앞에 서면 마치 한 줄의 시 앞에 선 듯한 고요함이 밀려옵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 겹치고 스며드는 색조,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 이강소는 그 여백 속에 수십 년의 사유와 실험을 담아냈어요.

작품을 자세히 보세요. 각각 다른 화면이지만 강약이 다른 유기적 붓의 흐름, 그리고 문자처럼 보이면서도 읽히지 않는 형태가 특징적이에요. 이는 실제 문자를 쓰는 과정과 유사하지만,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기운과 형상의 리듬 자체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강소는 전통 수묵화의 정신성과 수행성을 현대 회화 위에서 실험해온 작가예요. 비록 먹이나 한지 대신 아크릴과 캔버스를 사용하지만, 긴 서예 붓을 사용하여 빠르고 직관적인 붓질을 펼치고, 그 안에 자신의 호흡과 몸의 리듬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화면 위를 빠르게 지나간 긴 붓의 흔적은 동양의 서예를 닮았고, 색의 절제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떠올리게 해요. 그는 두 세계를 오가며 오롯이 자기만의 회화적 언어를 만들어갔습니다.

작품의 색채는 절제된 흑백과 회색 계열로 구성되어 있어요. 화면에 드러난 여백의 사용은 동양화의 '비어 있음'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운생동, 즉 생동하는 기운을 어떻게 화면에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예요.

서예붓으로, 아크릴 물감으로, 서양의 캔버스를 동양의 정신으로 채색해온 이강소. 그의 붓은 단순히 형상을 그리는 도구가 아닌 삶의 리듬과 철학을 직조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인 '문명의 이웃들'과도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이강소의 회화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문자와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묵이 여전히 살아있는 예술 언어임을 증명하는 동시대적 회화 실천이라 할 수 있어요.

관람 포인트는 하나하나의 획을 따라가며 작가의 숨결과 리듬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문자가 아닌 조형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붓의 흐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화면 속 청회색의 선들은 파문처럼 퍼지며 보는 이의 감각을 조용히 흔들어요.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무엇이 동양이고, 무엇이 현대인가?‘

이강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붓의 춤으로, 여백의 울림으로 건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