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dio guide LIST
Language
통계학적풍경화
이창진 – 흐르는 풍경, 이어붙인 기억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풍경입니다. 이창진 작가가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꿰매어 만든 '시대산수'입니다.

이창진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그는 오래된 그림들을 수집해요. 전통 화첩의 한 장, 가게 벽에 걸려 있던 산수화 족자, 누군가의 거실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을 동양화들. 주로 주택가나 분리수거장,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찾아낸 잊혀진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들을 그대로 보관하지 않아요. 오려내고, 붙이고, 다시 구성해서 완전히 새로운 장면을 만듭니다. 이것은 단순한 콜라주가 아닙니다. '산수'를 재구성하는 사회적 실험이자, 전통과 일상의 기억을 수집하는 감각적 지도라고 할 수 있어요.

작품을 보세요. 낯익은 듯하지만 결코 한눈에 담기지 않는 낯선 장면이죠. 물감을 새로 칠한 게 아니라 시간의 결이 배어 있는 종이들을 이어붙여 완성한 풍경입니다. 여기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수백 점의 '그림들'이 들어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이 섞인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현실보다도 더 복합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여러 시대의 기억이 한 번에 펼쳐진 것 같지 않나요?

이창진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전통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는 전통을 박제하지 않아요. 오히려 시간의 층위를 세심하게 꺼내어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배열합니다. 동양화의 여백, 구도, 필획 자체를 해체하고, 특히 자투리 종이나 여백 같은 주변부를 과감히 전면에 배치해요. 이를 통해 기존 시선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무명 화가들의 그림에 담긴 감각과 감정의 잔해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아닌 이름 없는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이 주인공이 되는 거죠.

이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은 '복제'와 '재조합'의 과정입니다. 이창진은 작품을 단순히 회화로만 보지 않고, 이미지의 유통 과정, 수집 경로, 전시 구조까지 총체적으로 설계해요. 중고 플랫폼에서 수거한 이미지들이 미술관의 하얀 벽으로 들어오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되는 겁니다.

이는 "예술이란 무엇이며, 누구의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되묻는 실천이기도 해요. 비싼 작품만이 예술일까요? 누군가의 거실에 걸려 있던 그림은 예술이 아닐까요?

이 지점은 이번 비엔날레 주제인 '문명의 이웃들'과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여기 보이는 작품들을 보세요. 서로 다른 시대, 다른 화가, 다른 양식의 동양화들이 한 화면 속에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흡수하고 교차하며 새로운 시각적 질서를 형성해요. 이것 자체가 하나의 문명적 대화이며, 수묵이라는 전통의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 수묵의 미래를 상상하는 실험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는지를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창진의 작업은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형되고 의미를 재생산하는 살아있는 조형 언어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은 그 풍경의 어디쯤 서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