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합 001-MY057
전광영 – 기억을 감싸는 손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거대한 구조물을 가까이서 보시면 수만 개의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광영 작가의 '집합'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의 재료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한자와 붓글씨가 적힌 오래된 문서들입니다.
과거 한의학 고서, 유학서, 편지, 장부 등 사람들의 삶을 담았던 종이들입니다. 글자가 지워진 문서, 이름 없는 족보, 낡은 책의 조각들이죠.
작가는 이런 오래된 서책과 신문처럼 시간을 머금은 종이들을 직접 염색하고, 잘라내고, 하나하나 싸매기 시작했습니다.
한지를 말아 감싸고, 또 감쌉니다. 색을 입히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봉
합니다.
이 과정을 작가는 단순한 조형적 실험이 아닌 '기억을 감싸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사용된 종이에
는 삶의 흔적이 묻어납니다. 과거를 기록한 손글씨, 닳아 없어진 가장자리, 세월이 만든 얼룩. 작가는 그 모든 것들을 소중히 다뤄서 작품 안에 새롭게 배치했습니다.
수십, 수백 개의 조각이 하나의 화면 위에 쌓이는 순간 전광영의 '집합'이 완성됩니다. 그 속에는 색이 있고, 질감이 있고, 무엇보다 시간의 결이 담겨 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접힌 조각들은 마치 세포나 돌덩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군집을 이룬 생명체처럼도
느껴집니다. 이들이 쌓여 하나의 구조물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개인의 조형 언어를 집단의
기억과 함께 마주하게 됩니다.
작가는 '감싸고 묶는 행위'에 동양의 철학이 있다고 믿습니다. 보자기처럼, 그 안에는 물질만이
아닌 정성이 담기고, 기억이 봉인되며, 전통이 비로소 현재로 이어집니다.
봉합됨으로써 종이 조각들이 다시 살아나고, 과거의 시간을 품은 조형이 됩니다. 이처럼 전광영의 작업은 형식 너머에 있는 정신성과 사유의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을 현대적인 산수라 부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동양의 추상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조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을 어떻게 품어낼 것인가? 전광영의 작업은 물질과 정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행위로서 보여줍니다.
종이, 문자, 접기라는 단순한 재료와 행위를 통해 수묵과 서예가 갖는 정신성을 현대 조각의 구조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 조각들 안에는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여러분을 둘러싼 공간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말없이 웅변합니다. 수묵은 선 하나, 먹 한 점을 넘어 기억과 사유, 그리고 시간을
담는 그릇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