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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니 VII
펑웨이 – 종이 위에 세운 이야기, 입체로 살아난 수묵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작품들은 중국 작가 펑웨이의 〈I'm Here〉 시리즈입니다. 펑웨이의 작품 앞에 서면 '그림'을 본다기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에 가까운 경험을 하게 돼요.

펑웨이는 수묵과 문학, 설치와 입체를 넘나들며 동양 전통 회화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확장해온 작가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한지 위에 먹을 얹는 전통 방식을 지켜오면서도, 이를 단순한 평면 회화가 아닌 공간을 채우는 입체 오브제로 전환시켜 왔어요.

작품을 자세히 보세요. 마네킹 위에 전통 회화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입혀져 있죠. 그 자체가 움직일 수 없는 몸이자 살아있는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종이 위에 번진 먹은 한 줄의 시처럼 속삭이고, 입체로 세워진 형상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우리 곁에 머물러요.

〈Hi-Ne-Ni〉 시리즈는 '나는 여기 있다'는 뜻을 품은 작업입니다. 유기적이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구성된 조형물로,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다가와요. 관객은 그 곁을 서성이며 마치 어떤 부재를 응시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Persian Capriccio〉 연작에서는 동양 수묵과 이국적 상상이 결합됩니다. 전통 먹화 위에 덧입혀진 플라스틱과 비단, 그리고 고전 페르시아 문명의 문양이 보이시죠. 문명이 어떻게 감각적으로 교차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에요. 먹이 더 이상 동양만의 언어가 아닌 문명의 대화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녀의 작업에는 이름 없는 존재들도 등장해요. 「Under the Tree」, 「Flying Birds」, 「Cicadas」 같은 조형은 작고 단순하지만 그 속에 시간과 정서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앉은 고요, 날아가는 새의 경쾌함, 매미의 울음 같은 자연의 파동이 먹의 결 안에서 조용히 살아 숨쉬어요.

펑웨이는 종이와 먹이라는 전통 재료를 회화의 평면성을 넘어 설치와 조각의 영역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동양적 회화 감성과 여성의 정체성, 감정의 층위를 동시에 탐구하는 거죠.

작품 속 인물, 곤충, 동물들은 곡면과 단면을 따라 흘러가며, 정적이었던 전통 산수화가 신체를 따라 3차원의 입체 풍경으로 재구성됩니다. 접히고 서 있는 종이 조각들은 책처럼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먹의 농담은 시간의 흔적과 감정의 진폭을 담아냅니다. 작가에게 수묵은 단순한 재현 기법이 아니라 기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입니다.

펑웨이의 수묵은 단지 그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쓰는 것이고, 세우는 것이며, 결국은 관객과 말 건네는 방식이에요. 그녀의 작품은 여성성, 전통, 문학, 사유가 겹치는 '감각의 장소'를 열어 보입니다. 절제와 우아함, 시적 정서로 구현된 그녀의 조형 언어는 수묵의 현대적 확장성과 감각적 교차성을 보여주는 작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