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02-35
하동철 – 빛을 그리는 화가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작품은 '빛의 화가'로 불린 하동철(1942-2006)의 대표작 〈light 02-35〉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빛'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일관되게 탐구한 화가였어요.
하동철은 단지 화가가 아니라 한국 현대 판화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어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습니다. 하지만 그를 진정 예술가로 만든 것은 교육이 아니라 사유였습니다. 어린 시절 연약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창밖의 태양 빛을 보며 받은 영감이 그의 인생 주제가 되었어요. 이후 25년 넘게 그는 태양을, 우주를, 생명의 근원을 끊임없이 화폭 위에 탐구해왔습니다.
작품을 자세히 보세요. 강렬한 색의 대비가 먼저 눈에 들어오죠. 하동철은 오방색인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을 바탕으로 화면을 구성했어요. 그 위에 수평, 수직, 사선이 교차하는 기하학적 구조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화면 위를 가로지르는 정교한 검은 선들입니다. 컴퓨터로 만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 손작업이에요. 작가가 검은 물감을 머금은 실을 팽팽히 당겨 화면 위에 튕기듯 놓는 방식으로 만든 겁니다.
그는 붓 대신 이런 실을 이용해 검은 격자선을 만들고, 그 위에 수작업으로 수십 번 색을 쌓아 미묘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공학이 아닌 감각으로 만들어낸 치밀한 색의 시예요.
이러한 선들이 만드는 격자 구조는 화면 속에 갇히지 않고 점차 흰빛이 번지듯 공간 전체로 확장됩니다. 마치 벽을 넘어 공간 전체를 밝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관람객을 물리적 경계를 넘어 정신적 차원으로 이끌어요.
하동철에게 빛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존재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모순을 꿰뚫는 절대적 질서였어요. 진실과 아름다움, 초월적인 감각을 상징하는 거죠.
그의 화면은 형식적이면서도 감성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명상적인 조화를 지향합니다. 동양 사유에서 말하는 '기운생동'과 '여백의 철학'이 새로운 언어로 살아나는 거예요.
화면 속 수많은 색의 결, 그 위를 가로지르는 검은 선 하나까지도 모두가 하나의 사유입니다. 하동철의 작업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빛과 존재를 향한 하나의 긴 호흡이에요.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빛 속에서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가?"
회화가 감각을 넘어서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