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dio guide LIST
Language
빛, 바람, 소리 그리고 바다 No 6004
한영섭 - 물성과 기억, 그리고 감각의 언어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작품들은 한영섭 작가의 작품들 입니다. 단순한 추상화가 아니라 몸과 역사, 자연과 무의식이 응축된 특별한 작품들이에요. 한영섭은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6·25 전쟁 당시 피난을 직접 경험한 세대입니다. 어린 시절 피난길에서 마주한 무너진 담벼락, 흩어진 잔해, 타다 남은 나뭇잎과 돌조각들... 그 조각난 풍경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서 지금도 작품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의 작업 방식은 정말 독특합니다. '탁본'이라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건 단순한 형태 복사가 아니에요. 화강암, 들깨줄기, 옥수수대, 황토, 나뭇잎 등을 직접 자연에서 채집해와서 한지 위에 두드리고 비벼냅니다.

화면을 자세히 보세요. 검은 흔적들이 반복되고 겹쳐져 있죠. 이건 형태를 그린 게 아니라 실제 자연 재료를 한지에 대고 문지르고 눌러서 만든 흔적들이에요. 마치 나뭇잎을 종이에 대고 연필로 문질러서 잎맥을 떠내는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문지르고 눌러 찍는 행위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기억의 단면들을 불러내는 신체적 의식이에요. 전쟁의 상처, 고향을 잃은 아픔, 분단의 현실 같은 것들이 손의 움직임을 통해 화면에 새겨지는 거죠.

나무껍질, 옥수수대, 돌, 들깨 줄기 같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자연의 재료들이 그의 작업 도구입니다. 이런 익숙한 것들을 통해 우리는 '풍경'이 아니라 '감응'을 마주하게 됩니다.

화면은 주로 단색이지만 결코 단조롭지 않아요. 붉은 흙빛 바탕 위로 갈라진 선들이 불규칙하게 흐르며 표면에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이 선들은 자연의 조직인 동시에 인간 내면의 균열을 보여주기도 해요.

일부 작품에서는 파란색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 것도 보이죠. 단조로운 반복 속에 생명의 숨결이 도약하듯 분출하는 느낌을 줍니다. 이 화면들은 추상화이면서도 어떤 '감정의 지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그의 작업이 특별한 점은 수묵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단지 '한국적 양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늘의 감각으로 새롭게 풀어낸다는 것입니다. 전통과 현대,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있어요.

이 조용한 화면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감각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