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바람 25-02
황인기 – 픽셀로 쌓은 산수, 감각의 조각들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압도적인 풍경은 전통 산수화를 기억하게 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작가 황인기가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디지털 산수화'입니다.
황인기의 작업은 정말 특별합니다. 전통과 기술, 손과 데이터가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나거든요. 그는 먼저 산수화 이미지를 컴퓨터로 픽셀화한 뒤, 각 픽셀에 해당하는 위치에 레고 블록, 크리스탈, 실리콘, 비즈 등을 하나하나 손으로 부착해 나갑니다.
이번 전시작 「오래된 바람」을 보세요. 가로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레고 산수 작업과 자동차 본네트에 산수풍경을 재현한 작품 두 점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먼저 자동차 본네트 작품을 볼까요. 전통적인 붓질 대신 수천 개의 작은 점들이 모여 풍경을 만들었습니다. 디지털 이미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손작업으로 만든 거예요. 산업 재료인 자동차 부품을 캔버스로 사용한 점도 흥미롭죠.
레고 산수 작품은 더욱 놀랍습니다. 멀리서 보면 산과 나무, 구름과 물줄기가 또렷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수천 개의 레고 블록이 반복과 집적을 통해 만들어낸 풍경이 펼쳐져요.
이 과정을 상상해보세요. 작가는 고전 산수화를 디지털로 분석하고, 이를 픽셀 단위로 나눈 뒤, 각 위치에 맞는 레고 블록을 하나씩 배치합니다. 기계처럼 정교하지만 그 어떤 기계도 흉내낼 수 없는 감각과 정성이 들어간 작업이에요.
그가 사용하는 재료들도 의미가 있어요. 반짝이는 크리스탈, 매트한 실리콘, 고운 비즈들... 이 이질적인 재료들은 각기 다른 시간성과 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 감정, 철학이 투영된 정신적 풍경을 만들어내는 거죠.
멀리서 볼수록 전체 풍경이 선명해지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재료의 물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재미도 있어요.
황인기의 작업은 전통을 단순히 보존하거나 흉내내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감각과 언어로 전통을 다시 말하는 시도예요. 픽셀로 쌓인 산, 손으로 찍어낸 구름. 비물질적인 자연을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이 작품은 현대 기술의 언어로 번역된 수묵의 또 다른 화법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오래된 바람'은 단지 과거에서 불어온 것이 아니라, 현재의 기술과 감각을 통과해 새롭게 구성된 바람입니다. 전통 산수화의 서정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만나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 거죠.
지금 이 작품 앞에서 우리는 '풍경을 본다'는 감각을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동시대 예술이 전통과 어떻게 대화하고, 또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